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명종은 태어나서 경원대군으로 즉위한 12대 임금 인종의 이복동생이다.
즉 인종이 정당성에 의해 먼저 왕위에 올라 갑자기 죽거나 후사를 가지지 않았다면 명종이 왕이 될 수 없었다.
사실 이 왕이 즉위할 때도 꽤 소란스러웠다.
명종의 열정
인종 때 집권하던 윤임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경원대군을 후계자 명단에서 제외시켜 자신의 권력과 생명을 지키려 했지만 당시 문정왕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언을 동원했다. 적 등을 도와 아들의 왕위 계승을 도운 덕분에 13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 당시 12세에 불과한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사람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했고, 수렴기에는 을사사화, 양재 역벽서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문정왕후의 수렴정화기에 대윤과 사림의 마땅한 신하들이 숙청되었고, 반대세력인 소윤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부패가 시작되었다.
소윤의 비리는 사람들의 혐오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민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월이 흘러 명종이 스무 살이 되는 해, 문정왕후는 수렴과 청정을 거두고, 명종은 직접 정부를 수립한다. 당시의 수렴과 청렴정치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의 권력은 상당히 컸지만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와 달리 현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기록으로만 사연을 평가해 주십시오.
여하튼 명종은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선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종은 이 시기를 잘 관리했어야 했지만 급사하고 후계자인 명종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중요했다.
또한 명종 때 왜구의 남침이 계속되었는데, 1555년 왜구는 약 70척의 배를 이끌고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하고 살육하였다.
이에 호조 판서 이준경, 김경석, 남치훈을 수비관으로 임명하여 영암의 해적 토벌에 파견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군의 필요성을 느끼고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판옥선을 도입하고, 총사령관을 개선하고, 수군을 개편하고, 권간제를 도입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대의 개혁이다.
재위기간에도..
그리고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던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명종은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을 이용해 윤원형을 견제했다. 당시 문정왕후가 생존해 있었지만 일절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사실 이량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김안로와 윤원형은 각자의 일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가계를 부양하는 것이므로 명종의 정책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이미 세력을 약화시킨 윤원형 파벌을 모두 숙청하고 부처를 탄압하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윤원형이 물러나자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사림이 다시 조정에 들어섰고, 이후 왕실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림에 의해 대간이 부활하자 명종은 제대로 된 의정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전처럼 사용할 왕권.
그리고 친가가 시작된 지 약 14년 후, 즉 명종이 34세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문정왕후를 걱정하여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는 본인마저도 갑자기 제대로 죽게 되니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아도 정치는 자연스레 흥망성쇠를 하게 된다.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회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려 1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명종 때 조선 왕실의 혈통이 끊어져 명종의 양자로 즉위한다. 왕좌를 왕으로.
이후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빛을 보려던 찰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불행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성군이 후계자로 추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명종이 생전에 하성군이 후계자로 거론되는 것을 알았으나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하성군과 덕흥군의 아들들은 궁궐에 자주 불려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의 풍습에 따르면 왕의 보살핌은 대개 세자가 맡았으므로 암묵적으로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명종이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하성군의 보살핌에는 문제가 없었고, 신하들이 후계 문제를 제기해도 즉각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후계자가 없는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명종에 대한 평가 조선의 선대 왕들 가운데 재위가 짧은 몇몇 군주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보잘 것 없는 왕이지만 종묘의 본당에 모셔지지 않은 왕이기도 하다.
또한 22년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가 상당히 미약했다는 것은 그가 통치 기간 동안 성취한 것이 없고 신하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포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